불 꺼진 강의실에서 대성통곡하던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인근 중학교에 다니던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성적은 평균 95점 정도. 본인도 나름대로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할 만한 성적이었습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상담을 통해 특목고에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특목고반에 합류한 첫 주, 영어 모의고사를 치렀습니다.
문제는 그 시험이었습니다.
평균 95점이던 학생이 마주한 낯선 점수
당시 모의고사에는 토플형 문제도 섞여 있었습니다. 학교 시험과는 문제의 성격도, 요구하는 영어 실력도 달랐습니다.
그 시험에서 학생이 얻은 점수는 전체 배점의 30% 정도였습니다.
채점이 끝난 뒤에도 아이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귀가한 뒤에도 강의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불을 끄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남학생이 성적 때문에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가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알고 있던 실력과 눈앞의 결과 사이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낯선 시험에서 받은 낮은 점수가 그동안의 노력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아이에게는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30분가량을 울었습니다.
다음 날, MP3 속 음악을 모두 지우고 찾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손에는 MP3 플레이어가 들려 있었습니다. 네, 스마트폰이 아니라 MP3로 음악을 듣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는 그 안에 저장해 두었던 음악을 모두 지웠다며, 영어 듣기 파일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전날의 울음보다 제게 더 오래 남은 것은 바로 그 행동이었습니다.
속상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생각해 온 것입니다. 늘 음악을 듣던 기기를 영어 공부에 쓰겠다는 작은 선택에서 아이의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그날부터 공부하는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매일 학원에 남아 공부했고, 부족한 부분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자정을 넘겨 공부하다 새벽에 귀가하는 날도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수업이 가능했던 시절입니다.
제가 그 시간을 기억하는 이유는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놓지 않고, 모르는 것을 확인하며 다시 공부하던 태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목표로 했던 경기외고, 당시 명지외고에 합격했습니다.
입대를 앞두고 꼭 만나고 싶다던 제자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른 제자를 통해 그 학생이 성균관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중3 때의 그 간절함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이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입대를 앞두고 있는데, 꼭 한 번 뵙고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 덕분에 자리는 금세 왁자지껄해졌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된 제자가 기어이 제게 술 한 잔을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잔을 채워 주며 몸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이가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가장 열심히 했던 때가, 저와 함께 공부했던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고 했습니다.
합격 소식만큼 오래 남은 한마디
학생을 가르치다 보면 반가운 합격 소식을 듣는 순간이 있습니다. 함께 세웠던 목표를 이뤘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자가 건넨 말은 합격 소식과는 또 다른 울림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로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입대를 앞두고 그 시간을 함께한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
제게는 세상 어떤 말보다 큰 칭찬이자 감사의 표현으로 느껴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학생의 변화를 만든 결정적인 선택은 학생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곁에서 공부를 돕고, 부족한 부분을 짚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좌절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때, 그 곁에 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참 고맙습니다.
학생이 공부할 이유를 찾도록 돕고, 그 마음이 실제 공부로 이어지도록 함께하는 일. 제게는 그보다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학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고요?
국세청에 들어가 근무했고, 지금은 독립해 자신의 세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네,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학생을 떠올리면, 불 꺼진 강의실에서 울던 모습과 다음 날 MP3를 들고 찾아왔던 모습이 함께 생각납니다.
그리고 입대를 앞두고 제게 건넸던 그 말도요.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그런 기억은 좀처럼 흐려지지 않습니다.